말씀 묵상 영성

영성에 대해 다시 생각하며

장광호 2005. 1. 15. 20:27

 

2년 전에 썼던 글입니다.

블로그로 이사해서 처음 쓰는 글을 이 글로 인사드립니다.

아직까지 적응되지 않은 상태라서....

 

 

요즘 며칠동안 갈등을 겪으면서 영성에 대해 많이 생각했더랬습니다.
이 과정에서 아내는 영성의 개념에 대해 이렇게 말하더군요.

"24시간 내 자신을 하나님께 기대는 것"이라고.

참으로 간결하면서도 핵심을 표현했다는 생각이 들어 공감했습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면서 끊임없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24시간 자신을 완전히 하나님께만 기대는 것 그것이 참 영성이 아닐까요?
그래야 항상 기뻐하고 쉬지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야 삶이 예배가 될 수 있는 것 아닐까요?

말로는 '영성' '영성' 하지만 참 영성이 어떤 것일까 겉으로 측정하기가 어렵지요.
지식적으로 이론적인 영성에 대해서는 많이 알고 있고, 또 이를 가르칠 정도지만
실제 그 삶 속에서 어려운 자를 보고 위로 한마다 할 수 없다면 과연 영성은 어디에?

그래서 저는 영성에 대한 개념을 묵상하면서 이렇게 정리해 보고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아프고 힘든 자를 발견하는 눈!
그래서 문제아를 문제아로 보기보다는 사랑이 더 필요한 사람으로 볼 수 있는 마음!
나를 힘들게 하는 자를 사랑을 더 받기 원하는 사람으로 볼 줄 아는 전환된 사고!
그 아프고 힘든 자에게 기꺼이 다가가 함께 울고 웃는 인자하고 겸손한 자세!
힘들어 아파하는 자를 위로하고 격려하여 새로운 삶을 살도록 만드는 기도의 능력!

이러한 것들을 다 갖춘 '사랑의 능력'을 가진 자가 진짜 영성이 있는 사람이 아닐까?

믿음의 단계에도 분명 여러 단계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인데,
그 단계를 하나씩 뛰어넘는 키워드가 이러한 '사랑의 능력'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사랑'이라는 단어가 외형적으로는 똑 같은 '사랑'이라는 단어로 보이지만
실제 '사랑'의 수준은 분명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신이 남에게 상처를 주는 고슴도치임을 아는 것이 자신의 교만을 꺾는 시발점이고,
또 그 상대방이 고슴도치임을 알면서도 끌어안을 줄 아는 것이 진정 사랑이라고 한다면,
고슴도치가 지닌 털의 강도가 세면 셀수록 더 큰 사랑을 요구한다는 것을 알고,
그 아픈 가슴을 기꺼이 안기 시작할 때 비로소 그 단계를 넘어갈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사실 어린아이의 사랑과 어른의 사랑은 질적으로 다르잖아요?
자신의 입장에서만 보는 유아적 사랑은 분명 사랑의 이름을 갖고 주려 하지만
오히려 상대방에게 더 큰 상처를 줍니다. 하지만 그래도 사랑의 이름을 갖고 있지요.
더 큰 문제는 유아적 사랑을 하는 사람은 자신이 그런 상처를 준다는 것 자체를 모른다는 것.

그런 의미에서 저는 연말연시에 '불우이웃돕기' 행사를 하면서
선물을 줄 때 그 분들을 모아놓고 전달하면서 사진 찍는 행위를 싫어합니다.
또 '불우이웃'이라고 써놓은 플래카드조차도 싫어합니다.
그들이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불우하다'는 것이 꼭 사실일까?
또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그들에게 그 사실을 꼭 알려야주어야 하는 것인가요?

그들의 인격을 정말 생각한다면 오히려 그런 모습들을 남기지 않고
그냥 조용히 전달하는 것이 더 사랑하는 방법이 아닐까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분명 영성의 시대인 21세기에 영성은 목회자든 평신도든 개인에게 꼭 필요합니다.
왜냐면 그것은 바로 한 인간에게 향하는 개인의 인격과도 직결되는 것일 뿐 아니라,
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영향력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 아무튼 목회 현장으로 한발짝 더 다가선 입장에서 더욱더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우선 "말씀"의 능력과 24시간 기대임 속에서 얻는 "영성"이라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