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부음을 들었습니다.
40대 후반에 젊음을 함께하며 인생을 논하던 친구들이 말없이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어느새 나도 그런 나이가 되었구나 하는 것을 새삼 돌아보게 되는 군요.
어느 누구든 죽으면 화려하든 아니든 간에 장례식을 치릅니다.
장례식은 죽은 자의 업적을 기리고 저 세상에서 평안함을 비는 의식임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어릴 때는 이 장례식을 정말 죽은 사람을 위해서 치르는 것인 줄 알았는데,
이제 장례식이 철저히 산 자들을 위해서 치르는 것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아 갑니다.
모두 슬퍼하며 화려하게 치루는 그 장례식이 과연 죽은 망자를 위해서 어떤 도움이 될까?
이미 그 어떠한 장례식도 그 망자에게 아무런 영향력을 미칠 수 없음을 우리는 안다면,
그의 생애를 돌아보며 우리에게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가르치는 의식이라는 게지요.
망자에겐 죽는 순간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는가에 대해 책임지는 순간이 온 것이지요.
그러니 이 세상 그 어떤 능력 있는 사람들이 그를 위해 복을 빈다 해도 아니될 말입니다.
단지 아직도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되면 좋겠다는 소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또 그런 위로와 복된 말들 그대로 망자에게 이루어짐을 믿고 싶은 것이라 생각됩니다.
‘죽음’이란 말을 묵상해보면 ‘내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라는 말이잖아요?
내 힘으로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육신의 생명을 유지할 때 살아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자신의 의지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이 죽음이라는 말이 분명하잖아요?
사후세계의 영역 안으로 들어갔으니 어느 누구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게지요.
죽은 자를 위해서 산 자들이 사실상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걸 알았을 때
우리는 하루빨리 냉정하게 현실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 현실로 돌아와서 제일 먼저, 그리고 중요하게 해야할 일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살았을 때 잘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나와 제일 가깝게 지내는 가족과 형제들, 이웃들에게...
살아있을 때 잘해야 하는데도 또 하나의 단서가 붙습니다.
오늘 이 순간에 잘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어린 자가 나중 간다는 보장이 없고, 나이든 어르신이 먼저 간다는 보장 역시 없습니다.
그리고 또 사전에 예약을 해놓고 가는 사람 역시 없지요.
우리 모두에게 허락되고 주어진 시간은 단지 오늘 뿐이고,
그 안에 내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시간은 오늘 뿐이라는 것이지요.
오늘 지금 이 시간 내 옆에 누가 있는지 한번 돌아보시지요.
함께 있는 그 어떤 사람들과 함께 정말 정겹게, 사랑하면서 살아갈 입니다.
화려한 장례식을 치러주는 것보다 백배나 의미있는 일이기 때문이지요.
언젠가는 내게도 닥치게 될 순간을 한번쯤은 생각해보면서
의미있는 하루를 살아가시는 모두 되시길 소원합니다.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고전1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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