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이야기들

'축복을 선언하라'

장광호 2002. 12. 4. 10:19

 

참으로 신기한 것이 아프게 만드는 녀석들이 없어지고 나서
전에 깨닫지 못했던 것들을 참으로 많이 깨닫는 걸 보니
아픈 만큼 성숙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며칠동안 바깥과 단절되어, 사회적 죽음을 맛보았다고 하면,
다시 관계를 회복했으니 부활했다는 생각도 들고요.

또 아픈 동안 여러분들이 아주 조그만 것이지만
제게 도움을 요청했었는데, 들어 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평소에는 제가 별 것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가도
아프지 않았다면 도울 수 있었을 터인데 라는 생각을 하니
건강하게 사는 것 자체가 도움을 줄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어제까지는 패잔병이 남아선지 머리가 무겁고 잠이 잘 안 오더니
아침에 눈을 뜨니 머리 속이 맑아지고 참으로 깨끗해짐을 느꼈습니다.
가만히 누워서 많은 생각을 하며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말씀과 지금까지의 삶의 모습들과 많은 연관을 지어지면서 묵상할 때
뭔가 다가오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오늘 제목입니다. '축-복-을-선-언-하-라'

우리가 축복을 선언한다 것은
우리 인간이 복의 씨를 뿌리는 것과 같다는 생각입니다.
그 복을 주시고 자라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씨들을 뿌리며 살아가는 지 모릅니다.
그것이 축복의 씨인지, 저주의 씨인지도 모르면서.
자신에게, 가족에게, 친구들에게, 만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지금까지 어떤 말들의 씨를 뿌리고 살아왔는지를
깊이 생각하면서 돌아보게 되면 쉽게 깨닫게 됩니다.

그들의 현재의 모습만을 보면서 불쾌한 감정을 가지게 되면
결코 축복의 씨앗을 뿌릴 수가 없지요. 저주의 씨가 되지요.
그 축복의 씨앗이 뿌려지지 않은 곳에는 축복의 열매가 당연히 없지요.
저주의 씨앗이 뿌려졌다면 가시와 엉컹퀴라는 열매가 맺히겠지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만히 이루어진 것들을 뒤돌아보면
내가 뿌린 씨앗들의 열매를 먹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 때
더욱더 아름다운 축복의 씨를 뿌려야 하는 것이구나 다짐해봅니다.

먼저 자신을 위해서 더욱더 긍정적인 씨를 뿌려야 하고,
두 번째 가장 가까이 있는 가족을 위해,
그것도 아파하는 가족을 위해 더 많은 위로와 격려의 씨를,
그리고 만나는 사람마다 사랑의 씨를 뿌려야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축복의 열매는 뿌리는 자 자신이 제일 먼저 먹는다는 것입니다.
축복의 열매가 자신에게 주어지는데는 시간이 안 걸립니다.
타인에게 축복한 열매는 그가 받을만한 때에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반드시 열린다는 것이지요. 시간이 더딜 수도 있지만.

'주는 사랑'님의 답글을 읽을때면 언제나 힘이 납니다.
언제나 '축복합니다. 사랑합니다'를 사용하지요.
언제나 그 말에 힘이 납니다. 저도 자주 그 말을 사용합니다. 배웠지요.

우리가 왜 그런 말을 사용하지 못할까요?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토록 많이 듣고 가르침을 받았는데 못 배웠다니 무슨 소리냐고요?

예! 못 배웠습니다.
듣기는 들었는데 못 배웠습니다.
듣기는 들었지만 실제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못 배웠다는 이야기입니다.
실제 우리는 (무엇을 하라는 가르침을 듣는데),
실제 (어떻게 하는지 구체적으로 배우지를 못해) 못하는게 너무 많습니다.

씨 뿌리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추수할 것이 없는 삶인 것이지요.


* 구체적인 배움과 가르침의 방법은 몸으로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다시는 잃어버리지 않는 방법. 그러나 언젠가는 반드시 기억나는.
신명기 6:4-9절의 말씀이 더욱더 다가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