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충만'이란 이런 뜻입니다.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성령충만'을 원합니다.
말씀을 깊이 읽는 가운데 성령충만해지는가 하면
열심히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충만해지기도 합니다.
또한 교회에서 하는 각종 집회와 행사를 통해 성령충만해지는 사람도 있고요.
기도원에서 하는 집회에 가야만 성령충만해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막혔던 마음이 열리고, 기쁨 충만과 가슴이 뜨거워지면 은혜받고 성령충만해졌다고 말합니다.
뭔가 신앙적으로, 생활적으로 무슨 큰 일이라도 다 해낼 것 같은 듯한 태도를 보이지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부분 이런 마음과 태도가 그렇게 오래 가질 못한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단순히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만으로는 '성령충만하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과연 '성령충만함'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를 놓고 한동안 깊이 묵상을 했었습니다.
'성령충만'이란 단어를 살펴보니 '성령'과 '충만'이 합쳐져 있었습니다.
'충만'은 '채워져 넘치는데 까지 가는 것'이라면
'성령 충만'은 '성령으로 마음에 채워져서 넘치는데 까지 간 상태'가 되더군요.
'채워짐'에는 반드시 먼저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있는데 '채워져야 하는 그릇의 비워짐'이었습니다.
그릇이 비워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아무리 좋은 것으로 채울려고 해도 채울 수없게 되잖아요?
결국 '성령충만'은 결단하고 '내 마음의 그릇을 비우는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에서 하는 각 설교시마다
또 각종 계절마다 각 절기를 따라 각종 부흥 성회를 하고
덤으로 좋은 강사를 모시고 와서 세미나를 하는 이유는 단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가지고 있는 욕심의 보따리와 더 갖고자 하는 탐욕의 마음을 비우게 하는 일'
결국은 '나를 죽이고 내가 죽는 것'
내 짧은 생각과 낡은 사고를 버릴 때 하나님의 새롭고 크신 은혜로 채워지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닐까요?
그런데 여기서 자칫 오해할 수도 있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먼저 내 그릇을 비우는 일이고 채워주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순서가 생긴다면
기독교도 먼저 선을 행한 결과로 뒤에 복을 받게된다고 가르치는 다른 종교와 다를바가 없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결코 그런 법이 없습니다.
언제나 일정하게 먼저 주시고 계시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호6:3)
단지 내 욕심의 보따리를 먼저 비우지 못해 성령충만의 기회를 놓치고 있을 뿐이지요.
이런 개념의 '성령충만'이라면
어떤 장소에서든, 어떤 시간이든 상관없이 성령충만해집니다.
내가 사는 삶의 현주소 그 자리가 나를 비우는 그 시간과 장소로 되기만 한다면 .......
그러기에 삶이 예배가 되어야 하는 것이겠지요.
그럼에도 지금 이 시간 성령충만을 위한
어떤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과 특별한 시간과 공간과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다고 하는 광고에만
현혹되는 분이 많음을 볼 때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것이니
곧 후히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주리라(눅6: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