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 사역 회복

죽을 때 가지고 가는 것

장광호 2003. 1. 27. 10:49

동기생의 죽음과 동년배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이틀 연달아서 들었습니다.
아직 마음으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소년들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나이인데도,
같은 시절을 산 이들이 하나씩 둘씩 떠나는 걸 보니 참으로 많은 생각이 납니다.
가끔 졸업 앨범을 뒤지면 제법 많은 이들이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 듣는 이야기의 대부분들이
'누가 언제 죽었다더라'는 것을 볼 때 이제 그런 이야기들을 더 많이 듣는 때가 되었는지
아니면 그게 사람들의 평상시 잃어버리고 싶은 주관심사 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누구든 '죽음'이라고 하는 단어 앞에서는 할 말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 인간에게 있어 '궁극적인 물음'이 되는가 봅니다.

너무 세상살이가 힘들어 입으로는 정말 죽고 싶다고 수없이 외쳤고 외치고 있다 하더라도
'누가 죽었다'라고 하는 이야기들을 들을 때는 안타까운 마음의 한 언저리에는
'아직도 나는 안 죽었구나' 하는 안도의 한숨이 쉬어지는 것은 왠 심사인지?

전역하기 전 1년 반 동안 교관 생활을 했는데, 연구 강의를 위해 3개월간의 준비기간이 있었지요.
남들 앞에서 서기 싫어하는 성격과 가르치는 일에 대한 두려움, 일종의 시험이라는 것 때문에
말로는 다할 수 없는 그야말로 엄청난 스트레스가 왔더랬습니다.
이를 한마디로 한다면 '사람을 두려워하는 강단 공포증'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당시 한창 신앙 생활에 열심을 내고 있던 참이었는데, .
어떻게 통과하느냐가 모든 일의 우선이 되다보니 자연 하나님은 두 번 째로 밀려나더라구요.

그런데 연구강의를 며칠 남겨두지 않은 어느 날 밤에 꿈을 꾸게 되었더랬습니다.
이른 아침 밝은 햇살이 창문을 통해 들어오면 그 햇살에 티끌 하나하나가 다 들어나잖아요?
그러한 모습이 보이면서, 이 모습을 보는 순간 이러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햇빛과는 비교도 안 되는 밝은 빛되신 하나님 앞에 다가가서 서는 순간
우리 인간의 죄가 다 이렇게 하나도 남김 없이 숨길 수 없이 드러날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 때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오직 단 하나!
'믿음' 밖에는 아무 것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셨더랬습니다.

이것을 깨닫는 순간 저는 더 이상 나를 평가하는 사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 죽음 뒤에 있을 심판에 대한 개념을 정리할 수 있었고,
또 '강단공포증'을 극복하고 실제 연구강의시 기존 교관처럼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했던 기억이 납니다.

장례식에 갈 때마다 모두들 빈손으로 간다는 것을 확인합니다.
그들이 이 세상에 남긴 업적과 돈들, 부귀 명예들을 의도적으로 칭송하지만,
결국 지나고 나면, 남은 자들에게, 뒤에 올 자들에게는 오히려 걸림돌이 되는 것을.


* 죽음 이후 하나님 앞에 설 때 '믿음' 만이 꼭 필요한 것이라고 한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좀 더 세상을 심플하게 그리고 욕심부리지 않고 살 수 있지는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런데, 문제는 죽음이라는 것이 꼭 오래 산 사람에게 먼저 닥치는 것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언제든 죽음에 대비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