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묵상 영성

다니엘과 세 친구가 겪었을 일들.

장광호 2005. 3. 6. 11:51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3:17-18)

 

 

다니엘과 세 친구의 이야기를 좀 더 해야겠습니다.

성경에 나온 이야기를 묵상하면서 다니엘과 그 친구들이 겪었을 상황들을 재구성해 보지요.

 

 

이들은 유대가 망한 뒤 포로로 끌려갔던 왕족과 귀족의 자녀들이었습니다.

 

당시 세계 최강이었던 적들은 성을 둘러싸서 굶겨 죽이는 전법으로 항복을 유도했습니다.

갇혀있던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자 서로의 자식들을 잡아먹어야하는 상황까지 갔습니다.

그래도 항복을 안하자 화가 난 적군들은 그 성에 구멍을 뚫고 불바다로 만들지요.

더 이상 버티질 못하던 왕과 귀족들은 두려움에 떨며 밤중에 어린 아이들의 손을 잡고 도망을 갑니다.

한 동안 도망쳐서 성공하는 듯 하지만 결국 어린 아이의 더딘 걸음 때문에 모두 붙잡히고 말지요.

 

조기엮이듯 사슬에 매여 멀디먼 낯선땅 바벨론까지 맨 발로 끌려갑니다.

하루에 40키로로 걷는다해도 50일이나 걸리는 엄청난 1,500-2,000키로의 길을 걸어야만 합니다.

피투성이의 발 정도가 아니라 뼈 마디가 다 드러나고 문드러지는 엄청난 고통도 겪었을 겁니다.

추위와 더위, 배고픔과 갈증 등의 음침한 사망의 골짜기를 몇 번이나 건넜는 지도 모릅니다. 

 

바벨론 땅에 도착한 그들은 바벨론의 그 엄청나게 크고 화려한 도시와 신전의 규모에 압도 당합니다.

이스라엘 산지에 있는 성과 성전이 제일 큰 줄로만 알았던 그들은 기가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겨우 목숨을 유지하고 있는 그들의 세계관과 종교관에 일대 혼란이 닥친 것이지요.

 

그런 와중에서 그들은 바벨론 왕을 섬겨야 하는 환관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에게 섬김을 받았던 그들이 이제 남의 나라에서 종으로 섬겨야 하는 입장이 된 겁니다.

화려한 옷의 자태를 뽐내던 그들이 수치스럽게도 벌거벗은 몸으로 남의 지시를 받는 자가 된 게지요.

 

이 쯤되면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자신의 정체성을 완전히 잊어버리게 됩니다.

이들 역시 왕성한 혈기에 몇 번이고 죽을려고 시도했을런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여러 명의 친구들은 죽기를 시도했고 소원대로 죽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내게 주어진 세상살이가 힘들다 해도 이런 정도까지 된 사람은 그렇게 많지는 않겠지요?

 

그런 반면 많은 사람들은 이제 자포자기한 채 생존만을 위한 소극적인 삶을 살기로 결심했을 겁니다.

그 속에서도 잘 살아보기 위해 적극적(?) 삶을 택한 기회주의자로 전락한 사람도 있을 겁니다. 

엄청난 갈등이 교차하는 가운데 많은 사람들의 인생이 상황으로 인해 바뀌어 가는 법이잖아요?

 

그런데 그 어린나이에 엄청난 상황을 다 겪어내었던 더딘 걸음마의 주인공들인 다니엘과 그 친구들이

새로이 목숨을 요구하는 이 절박한 상황 속에서 이러한 여느 사람들과는 달리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신앙을 고수하고 있는 겁니다.

신앙의 진수가 뭔지를 보여주는 시험대에 오르고 있는 것이지요.

 

도대체 이들의 이러한 신앙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도대체 그들에게 이러한 신앙을 가르쳐준 스승은 누구였을까요?

예레미야나 에스겔과 같은 선지자 들이었을까요?

 

 

어느 누구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수차례에 걸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구원해주셨던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신앙의 새로운 차원을 보여주시도록 도구로 쓰신 것은 아닐까요?

"그리하니 하실지라도"라는 차원의 신앙이 어떠한 지를 보여주시기 위해!